남편 대학동창회에서 퍼온 사진.흰동백꽃.
5월21일.2016년.토요일.
기온이 내려 간다더니 흐리고 바람이 불고 있다.
구글 날씨를 보니 오후 4시부터 비가 온다고 한다.
아침 일찍 부엌에 내려가 냉커피를 마시고 이층에 왔다.
귀가 밝은 막내를 안 깨우려고 발소리 안내게
조용히 사뿐히 걸어 갔다 왔다.
오후에는 남편 동창회에 가려고 하는데, 비가 오려나 보다.
지난달에 아버지께서 돌아 가셨던 남편친구가
전체 동창들에게 저녁을 내겠다고 했는데,
따로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꼭 우리부부는
오라고 해서 간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가야한다.
남편친구 부부는 정말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데
얼마나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지 모른다.
행복은 가지고 있는 소유하고는 무관하다고는 하지만
집도 없고, 노인아파트에 살면서,
암투병중인 부인하고 같이 사는데
얼굴이 환하고 밝은것을 보면,
그 부부가 신기해 보이기까지 하다.
무소유의 해탈을 경험하고 사는 부부같다.
친정건물옆에 심은 장미꽃.
우리 친정은 힌국서 가난하게 살았다.
아버지께서 남동생둘(작은 아버지둘), 여동생둘(고모둘)을
대학까지 보내주시고,
결혼까지 시켜주시고도,
또 없는 데서도 가난한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도와 주시니,
우리가족은 정말 어렵게 살았다.
그래서 미국에 와서는 잘살게 될줄 알았는데,
아버지주변에는 늘 돈 없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었다.
아버지께서는 하시던 공부를 중단하시고 .
신문기자 특파원으로 60년대에 미국오셔서
가발로 돈을 버신 친구분을 만나셔서
가발가게에서 일을 하시고, 메니져가 되신후
친구분께서 아는 변호사를 소개해서
영주권을 가지시게 되셨다.
그당시는 학생비자로 들어왔다가
그렇게 영주권이 나왔던 시대였다.
그래서 우리가족도 미국에 올수 있었는데.
와서보니, 아버지께서는 그 가발가게에서 일한 봉급을
모으셔서 권리금없이 유태인 할머니 소유의
빌딩에서 그로서리를 하시고 계셨다.
그런데도 종업원이 둘이나 되는데
일 끝나고 돌아 가면서 한보따리씩 돈도 안내고,
소다나 삭료품등을 싸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께 이러시면 안된다고 말씀드렸다.
한명은 백인이고, 한명은 아버지친구 아들이었다.
그렇게 공짜로 싸가지고 나간 소다를
빈병은 돌려 주면서 리베이트도 달라고 해서 받아 가는데
이것은 말도 안되는 양심을 가진 아버지친구 아들과, 종업원이었다.
그래서 둘다 내보냈다.
온가족이 들러 붙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조금만 열심히 일을 하면
살아 갈수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파트값을 못내서 쫓겨나게 생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거의 매일 도와 달라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가지않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해서 모아둔 것을
아버지께서는 가져다 그 사람들에게 주었다.
형제들은 학교가 끝난후 가게로 와서 아주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그 돈을 꺼내다 다른사람 도와 주신다고
가져 가시니 가족들이 볼때는 기가 막혔다.
아버지께서 온가족이 같이 일을 해서 인지
매상이 많이 늘었다고 좋아 하시면서
돈을 더 빼 가시는데,
우리 형제들에게는 화나는 일이었다.
하루에 $350하던 매상이 $1000이나 되니까
아버지께서 자랑하시고, 소문을 내시니,
어떻게 알고 왔는지 생면부지의
유학생부부까지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하고...
그래서 가족회의를 했다.
아버지께서는 일하는 우리 형제들에게
미국사회에서 주는 인건비를 그대로 주셨는데
봉급은 알아서 빼가라고 하시니
정말 이렇게 돈에 대해서 모르시는 아버지께서
그동안 종업원들에게도 그리 하셨는지 모르지만
우리형제는 가족회의 결과가 아버지께서
다른사람 많이 못도와 주시도록 매상의 일부는 빼서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자고 해서 그렇게 실행하기 시작했다.
남을 의심하실줄 모르시는 아버지께서는
다른 데도 불경기라고 했다면서
전혀 눈치를 못차리셨다.
그렇게 어머니께 가져다 드린 돈이 만불이 넘었을때,
아버지께 "이 건물을 삽시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놀라시면서도, 그 유태인 할머니가
매달 지팡이 집고 나타나서
인상쓰면서 가게를 잘 청소하라는둥 하는
잔소리 안들어서 좋다고 기뻐 하셨다.
아마도 아버지생애에 처음 만져 보시는 현금같았다.
70년대에 만불은 상당히 큰돈이었다.
아버지가게 근처에 타운하우스가 그 당시는 $7000이면 살수 있었다.
건물값은 $80000이었다.
그래서 옆에 세탁소까지 달린 건물이 친정소유가 되었다.
그로부터 알렉산드리아 동네는 급격히 변화가 왔다.
지하철이 들어오고,
허름한 아파트는 없어지고 ,
아주 산뜻한 타운하우스들이 세워지면서
아버지 소유의 빌딩값도 뛰었다.
동생들이 말을 안해주고, 나도 물어보기도
뭣해서 모르지만 상당히 비쌀것 같다.
동네가 가난한 사람은 살수 없는 동네로 변신을 했다.
그동네 타운하우스가 이제는 거의 70-80만달라나 된다고 한다.
어머니는 말년에 복이 많으신지 랜트비만 가지고 사시는데도
부족함이 없이 잘사시고 계신다.
정말 형제들이 합심해서 속된 말로 삥을 잘해서
어머니께서는 편안하신 여생을 사시고 계신다. 나도 거기에 일조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