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결혼 할 무렵의 모습.
12월 16일 .2017년.토요일.
친정 어머니에 대해서 요즘 자주 생각을 하게 된다.
뉴져지 집에서 운전해서 3시간반 걸리는
버지니아주에 사시니 비교적 가까이 계신다.
그동안 자주 가서 뵙지는 못했어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잔잔하게 마음에 평화가 오곤 했었다.
그런데 어머니연세가 내년이면 한국나이로 89세가 되신다.
1930년 7월9일생이시니 미국에서는 만으로 87세시다.
어머니 백일때 .
어머니께서는 외조부모님의 장녀로 태어 나셨다.
외할아버지댁 웃어른들이 잘사시던 분이셔서
어머니는 잘살던 집에서 귀하게 자라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는 서양 사람처럼 생기셔서
엄마나 다섯 이모들이 다 키도 크고 인물이 좋으시다.
엄마는 상당히 많은 사랑을 받으시면서 자랐다고 들었다.
다른 이모들이 그렇게 말씀들을 하셨다.
맨 오른쪽에 계신 어머니여학교때.
언젠가 친정에 갔는데 어머니께서 사진첩을 다 없애 시겠다고 하셨다.
엄마 어릴때부터 사진을 보는 것도 자녀들에게는 즐거움인데
왜 없애시겠다고 하시느냐고 내가 못하시게 했다.
아마도 언젠가는 모르지만 이 세상 떠나실 때를 준비하시는것 같았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도 젊은 날을 추억하시면서 돌아 가실때까지는
가끔 사진을 보시고 싶으실 때가 있으실 테니, 그러시지 말라고 내가 말했다.
요즘 그때 어머니와 주고 받은 대화를 생각하면 슬프다.
어머니여학교때 맨 오른쪽에 서계신분.
누구나 한번 태어나면 한번 죽게 되는 것인 줄은 알지만
이별은 섭섭하고, 사별은 슬프다.
난 아직 전혀 어머니와 사별할 생각도 없고, 준비도 전혀 못한 상태이다.
어린 날에는 어머니가 무서웠다. 내가 큰딸이라 그런지 어머니께서는
내게 너무 엄하게 하셨고, 한참 내 머리가 잘 돌아 가던 십대 때에는
어머니가 계모같이 느껴졌던 적도 있었다.
너무 내게 신경질을 많이 내셔서 나는 말대답도 잘했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보통때처럼 내게 야단을 치시고 계셨는데,
그러시던 어머니를 보신 아버지께서(내가 듣고는
아버지께 고맙기도 했었는데),그렇게 기분대로
내게 신경질을 내시지 말라고 화를 내셨다.
내가 이해할수 없었던 일로는 하루종일 집에 계셨던
어머니께서 방금 학교에서 돌아온 내게
설거지하라, 방청소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다들 학교에 가면 어머니 혼자 집에서 계셨는데
그동안 무엇을 하셨는지
다른집 아이들은 설거지도 하고 방청소도 한다는데,
너는 큰딸이 되어서 아무것도 안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막 빗자루를 들고 방을 쓸고 있었는데
또 부엌에서 내게 야단을 치시는 소리가 들리면 쓸던 빗자루를 집어 던지고
아예 못들은 척하고 엄마께 반항심만 가득했던 때도 있었다.
여동생이 얼굴이 항아리손님으로 앓아서 얼굴이 부었을때.
( 맨 오른쪽에 나.초등학교 5학년때 가족사진.)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께서 가난한 집에 시집을 오셔서
고생을 너무 많이 하시니까 스트레스를 내게 푸셨던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영어선생님으로 부수입도
꽤 많으셨었지만 버시는 대로
집에 안가져 오시고,적은 생활비만 어머니께 주시고
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오셔서인지
가난한 살림을 꾸리시기가 힘드셨던것 같았다.
결혼을 49년에 하셨는데,
그때부터 시동생들을 데리고 사셨다.
내 어릴 때는 삼촌들과 같이 사는 것이 너무 좋았었지만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살았던 것이 너무 힘드셨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교육자집으로 시집을 오셔서 더 그러셨던것 같으셨다.
전주여고를 졸업 하시고, 대학에 가고 싶으셨는데,
바로 결혼하셨던 것이 참 싫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와 큰남동생.큰남동생 돌때 사진을 보고 그린것.
어머니께서 이대는 들어 갈수 있었는데,
외할아버지댁과 같은 교회에 다니시던
내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께서
어머니를 며느리감으로 탐내시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끈질기게 졸라서
결혼하게 되셨다고 하셨다.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께서는
전주고 1회 동창이시고, 같은 교회 장로님들이셨다.
예전 어머니사진은 내가 보기에도 뛰어난 미모셨다.
여학교에 다니실때 친척분들께서 매일 학교에 따라 갔다가
학교가 끝나면 같이 집으로 오시곤 하셨는데, 그 많은 여학생중에서
어머니께서 눈에 띄게 예쁘셨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중 한분이 어머니 고모분이셨다. 나는 그분을 고모할머니라고 불렀다.
나는 어머니를 안닮고 아버지를 똑 빼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어머니께서 시집살이가 힘드셨던지 첫아들을 사산하셨다고 한다.
맨왼쪽이 작은아버지시고,내아버지시고,큰아버지와 큰고모(맏이)시고,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와 막내삼촌과 두고모들.
아들넷에 딸셋을 두셨다.
그렇게 첫아들을 사산을 안하셨으면 나는 아마도 이세상에 안 나올뻔 했다.
예전 어머니들께서는 대게 모유수유를 하시니까
2- 5년 터울로 아기를 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는 딸만 여섯있던 외가에서 자라셨다가,
첫아들을 낳다가 사산을 하셨을때 많이 속상하셨을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너무 기진하셔서 그러셨는지 아무런 생각을 못하셨다고,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많이 우셨다고 말씀하셨다.
친할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다.
그리고 정년퇴직을 하셨지만 아직 삼촌들 고모들이 학생때라
그당시 자녀 7명을 다 대학까지 보내시려고 , 아버지께
" 네가 대학을 나왔으니 학교선생으로 일하면서 ,
이제부터는 동생들을 책임지고 대학보내라 !"고 하셔서
아버지 월급에서 모자라는 돈은 영어과외등으로 바쁘게 일하시면서
삼촌둘, 고모둘을 대학보내시고 결혼까지 도와 주셨다.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부엌에서 우시는 것을 보았다.
밖에서 뛰어 놀다가 엄마를 찾았는데, 안보이셔서
닫혀있던 부엌문을 열었는데, 어머니께서 울고 계셨다.
나를 보시고 손짓으로 나가라고 하셔서 뒷걸음쳐서 밖으로 나온 이후
어른이 된후에야 어머니께 왜 그때 그러셨냐고 여쭈어 보았다.
자라면서 궁금했었지만 마음에 묻어두고 살았다.
그당시 아버지께서 과로로 교실에서 쓰러지셔서 병원에 가신 날이라고 하셨다.
안경쓰신 아버지와 전주고 동창들.
그때 일이 너무 힘드셨던지 아버지께서는 저녁에는 친구선생님들과
또 술도 많이 드셨는지 학교강단에서 각혈을 하시고 쓰러지셨다고 한다.
그것을 본 학생들이 김선생님께서 일년 열두달 같은 양복만
입고 다니신다면서 양복이라도 사드리자면서 돈을 모아서
어머니께 드렸다고 한다,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 바로 밑의 삼촌이
형님은 나이가 드셔서 아무렇게나 입으셔도 되지만
자기는 대학생이라 새옷이 필요하다면서 어머니께
그돈을 달라고 해서 가져 갔다고 한다.
친정옆집에 있는 함박꽃.얼마나 큰지 내 엄지손가락과 비교를 했다.
내가 어린시절 밖에서 뛰어 놀다가 엄마가 안보이셔서
부엌문을 열고 들여다 보았을 때가,삼촌이 그돈을 가져간 후였었다.
그런데 그렇게 가난했던 때에도 아버지께서는 가난한 학생들을 많이 도우셨다.
아버지께서는 문리대를 나오셔서 꿈이 교직은 아니셨을텐데
할아버지께서 학교에서 영어선생으로 일하라고 하셔서 바로 그렇게 하셨다.
요즘에야 부모님들이 자식의 꿈을 소중히 여기지만 예전 어른들께서는
효자가 되라고 강요하시지 않았나 생각된다.내 아버지께서는 둘째 아들이셨다.
예전에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고생도 하고 편하게 살게도 되는 시절이었다.
내 어머니에 대해 나도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고 나니 많이 이해가 된다.
지금 내 아이들을 생각해보니 그 당시에는 많은 분들이
일찍 20살도 안되어서 결혼을 하셨지만 너무 어린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아이들이 30살이 넘었는 데도 어린아이같다.
미국에서 나가 한국서 내 결혼식때 어머니.
그 어머니께서 지금은 얼마나 약해 지셨는지 어린아이 같으시다.
내가 친정에 가면 내가 좋아 한다고 가지나물을
많이 만들어 놓으시고 기다리시면서 얼마나 반가와 하시는지 모른다.
내가 뉴져지집으로 돌아 가려고 하면 또 언제 올거냐고 물으신다.
서운하다 못해 슬픈 얼굴이 되신다.
내 어린 나이때는 그렇게 무섭던 엄마가 어린 아이처럼 맑은 얼굴로
내가 친정에 가면 말씀을 하시고 싶으셔서 내 옆에만 앉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