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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운 할머니

푸른하늘 파란하늘 2012. 4. 4. 22:11



대문앞에 위핑-체리( 버드나무와 접목한 벗꽃 )가 활짝피고

그 주변을 흰, 아니 연분홍 꽃눈이 덮힌듯 온통

하얀색으로 내려앉아서 정말로 " 봄 이로구나 " 실감이 난다.


지난 밤에는 밤새 비오는 소리를 들었는데 ,

아침이 되니 하늘이 푸르고 맑다 .


봄 방학이 되어 막내를 컴퓨터 앞에 앉혀놓고 ,

운동을 하러 헬스-클럽에 왔다 .

1시간 이상 뛰고 , 30분 정도는 6개의 운동기구를

조금씩들 하고는, 아랫층으로 내려와 샤워를 하고 사우나에 들어왔다 .


어떤 여자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누워서 자고 있는것처럼 꼼짝도 안하는데

얼마나 오래 있었던 것일까 ?

기운 좋은것이 부럽기도 하고 , 어떻게 될까봐 걱정도 된다 .

아까 샤워 하기전에 창문으로 들여다 보았을때의 그 자세로

오래 누워있다가,  드디어 막 나갔네 ...

그래서 또  나 혼자 앉아 있게 되었어 .

모래시계가 거의 다 떨어졌으니 이제 나도 곧 나가야지 .


나도 할머니가 될것을 생각하며 6년전 쯤에 교회 게시판에 썼던 글인데..

우리 할머니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곳에 다시 옮겨본다.


*                       *                          *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


할머니께서는  7 남매를 낳으셨다 .

아들.딸.아들.아들.딸.딸.아들  이렇게 많은 자녀중에서 나의아버지는

둘째 아들이셨고 , 나는 아버지의 첫째 아이였다 .


집안마다 어떤사정이 다 있겠지만 , 큰아버지는 수학공부를 하러

동경유학까지 가셨던분 이었는데 할아버지 댁과는 인연을 끊고 지내셨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셨던 나의 아버지께서 큰아들 몫을 감당하시게 되었다 .


사람들이 아버지를 효자라고 칭찬들을 하셨는데 , 그래서인지 나는

친척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

우리할머니께는 25명쯤 되는 손자. 손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나와 할머니와의 관계는 특별 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할머니 얘기를 꺼내면 , 나의남편은 자기가 세상에 나오기 훨씬전에 

모두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르고, 할 얘기도 전혀 없다고 한다 .

그도 그럴것이 내가 결혼 할 당시에 우리 시어머니의 연세가

나의 외할머니 보다 훨씬 많으셨으니까 ....


내가 친탁을 많이 해서일까, 어렸을때 내 얼굴을 보시던 어른들이

아버지같고 삼촌들 같고 , 할아버지 같다고들 하셨었다 .

그래서 할머니께서 더 나를 사랑하셨는지도 모르겠다 .


할머니에 비하면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차갑고, 무섭고

근엄하신 얼굴을 가지고 계셨던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학때나 쉬는날이면 언제나 할머니를 그리워하여

할아버지댁에 가 있었던 기억이 많았던 것은 , 어릴적부터

가치있는 일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불편함이나 혹독한것도

스스로 견딜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찍 터득 했었던것 같다.


할아버지께서는 '사랑 하시기 때문' 이라며 회초리를 자주 드셨는데

내게는  그  '사랑' 이 너무도 무서웠고 아팠었다 .

한국나이 대여섯살때부터 목침위에 올라가 종아리에

빨간줄이 불거지도록 맞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


어떤일이냐 하면, 한참때의 어린이니까 노상 뛰어 놀다가

댓돌위에 신을 벗어 놓을때면 한번도 나란히 벗어 놓지를 못하고

한짝은 이쪽에, 또 다른 한짝은 저쪽에 떨어져 놓게 되는데

그때마다 할아버지 눈에 띄게 되었다 .


" 미야야 . 네 신이 어디 있느냐 ? 와서 보아라."  그러시기를 세번쯤 했을때

" 어떻게 생각 하느냐 ? 잘 했느냐 잘못 했느냐 ? " 라고 물으시면

겁에질려 잘못 했습니다 라고 대답 했었다 .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  목침 가져 오너라 . "

그리고 그위에 올라가 서서 회초리를 맞았었는데 ,

물론 이 다음에 좋은사람이 되라는 뜻 이었겠지만

그때 겨우 다섯살 이었으니까 무엇을 그리 알겠으며 오히려

내게 할아버지는 너무 무섭기만 하신 분이셨다.


미국에서 였으면 당연히 아동 학대 죄에 해당 되는 일이 었겠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당연시 되고 있었다 .


할아버지께서 회초리를 드실 때마다 할아버지에 대한 무서움 보다는

그 앞을 막아 서시던 할머니 때문에 ..

그 따뜻한 할머니가 계신것이 너무,너무 든든하게 생각되었다 .


지금 가만히 생각 해봐도 이상한것은 그래도 나처럼 자주

할아버지댁에 찾아 다니던 손자.손녀가 없었으므로 나만이

그 회초리를 맞을 수 있었던 유일한 손녀 였던것 같다 .


만약에,만약에.... 지금 타임머신을 타고 그시절로 되돌아 갈수만 있다면

나는 또 할머니가 계시던 그곳을 찾아갈 것이다.


비가 흩뿌리고 바람부는 날에도, 꽃피는 봄날에도

과일 나무마다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던 날에도, 눈이 쌓여있던 겨울날에도

셀수없는 수십년의 기억이 거기에 머물고 ....

내속 깊은 어느 한곳에서는 ..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가 살아있어

계속하여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살게 되었다 .


*                           *                          *



                                                                              어머니와 다섯 이모들 (앞의 리본 단 아이가 나 )


보통 사람들은 외할머니를 더 가깝게 생각한다고들 하지만

내게는 6개월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 이모가 있다보니 , 외가에만 가면

극복 할수 없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곤 했었다 .


친정어머니 21살, 외할머니 42살때 두분이 같이 아이를 낳으셨다.


외가에 있는 모든것은 막내 이모가 소유권을 주장하기 때문에

모두 나를  예뻐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외가에서 막내이모 보다는

더 가까이 다가 갈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외가식구들은 다 들 서양 사람처럼 코가 오똑하고

눈도 크고 움푹 들어가게 생기셔서 , 어릴적 내가 외가에만 가면

코가 납작하다고 놀림을 받곤 했었는데

그것도 속으로는 기가죽는 이유가 되었었다.


그래서 외가에 있다가 친가 할머니께 가게되면  " 할머니 . 왜 나는 코가 납작해요 ?"

"누가 그러더냐 ? 네 코가 얼마나 예쁜지 너는 모르는구나.

  곧 커서 코가 살아나면 그때 보자고 해라 !."


할머니는 항상  내 편 이셨다.


어릴적 외가에서는, 잘 놀다가도 어느 한순간 막내이모와 몸싸움이 일어나고는 했다.  

그럴때마다  " 아니 누가 이모를 때려? 그러는거 아냐 !"

그 소리를 들으면서 상처를 받고 있는데,

" 너 -  가 - !. 보기싫어. 가 !" 라며 막내이모가 텃세로 몰아세우면

일단 신을 신고 아주 처량한 마음으로 갈 준비를 하는데 ....

( 어쩌면 붙잡아 주기를 바라고 시간을 더 끌었던지도 모른다 )


다 들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그길로 30분(아마 1시간)도 더 걸리는

친가로 단숨에 와서는 할머니께 자초지종을 말하면서 울었던 생각이 난다 .


외가는 이층집이었고 친가 보다는 뭐든지 넉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



친가는 뒷마당 전체와 앞마당 대문까지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저 있던 큰 한옥이었다 .


얼마나 오래토록 자라서 튼튼하게 울타리가 되도록 자란 것인지

가시가 사방에 뾰족거리고 키가 높게 총총히 울타리를 만들어서는

노란 탱자열매가 잔뜩 달려있었다 .

먹을거리가 흔하지 않던 때여서 그랬는지 탁구공만한 탱자열매도

먹을 만했다 . 시고, 달고, 쓰고....그랬었던 기억이 난다 .


여름내내 멋대로 가지를 뻗던 탱자나무 가지를, 할아버지께서

잘라 내셔서는 부엌 한쪽에 수북히 쌓아 두셨었다.

그것으로 밥을 지을때나 아랫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었는데, 나는 풍로를 돌려 가면서

아궁이앞에 쪼그리고 앉아 연기가 가끔씩 거꾸로 나와

눈물.콧물을 흘리면서도 할머니와 불때기를 좋아했었다 .


할머니께서 식사를 준비하시는 동안 나는 할아버지께서 계시는 

따뜻한 아랫목에 있기 보다는 할머니와 함께 부엌을 떠나지 않고

뭐든지 돕고 싶어했다 .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추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혹시 탱자나무 가시에 찔리기라도 하면 피를 꼭 짜내어 주시고

입김으로  호 ~ 불어 주시면 그 아프던 손도

안아프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


할머니는 온전히 나를 사랑해 주시던 유일한 분 이셨다 .


때때로 내가 우리형제들 중에서 제일 큰아이라고 ,

나의 부모님께서 엄하게 하실때도 있었으나 할머니는 내가 고쳐야 할 

그 어떤 말씀도 야단 치시는것 같지않게 알아들을 수 있는 따뜻함으로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


할머니께서 다독거려 주실때면 항상 새힘이 생기곤 했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 세월이 오래 지나도

외로울때나 혹은 살아 가다가 괴로운 일을 만날 때마다

떠올리고는, 그리움으로 혹은 삶속에서 영양분처럼

새롭게 마음을 다지는 좋은 계기가 되는것 같다 .


나를 끔찍하게 사랑해 주시던 할머니 !!


이제 내 주위 친구들이 많이들 할머니가 되는 요즈음..

크나큰 그리움으로 자주 생각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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