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점심으로 주었던 잔치국수.
5월3일.2016년.화요일.
부엌에서 남편에게 줄 잔치국수를 준비하면서 ,
여학교때 네명이서 같이
뭉쳐 다녔던 친구들을 생각해 보았다.
죠지아주 사는 친구는 아들없는 집 장녀라서,
지금은 홀로 사시던 어머니와 같이 살려고
긴 미국 생활을 잠시 접고,한국에 나가서 살고 있다.
친구의 두 딸들은 결혼해서 미국서 살고 있다.
지금 어머니 연세가 내가 알기론 88세 신것으로 안다.
Berlin Flea Market에서 본 화초.
어릴때는 너무 예쁘던 친구가
자라면서 내성적이라서 별로 안웃고,
그래선지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것
같았는데 내 눈에는 제일 예뻤다.
아버지께서 중학교 1학년땐가 편찮으셔서 돌아 가셨다고 했다.
친정 어머니께서 생활력이 있으셔서 딸 넷을 이대를 보내셨고,
내가 미국에 있어서 몰랐지만 ,
결혼할때 아파트 한채씩을 어머니께서 사주신 것으로 알고 있다.
공원에서 본 흰꽃
어찌 되었는지 미국서 살다가 한국에 나가게 된 일이,
등 떠밀리어서 결혼하고 오라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내가 미국서 나갔으니까 한국 실정을 너무 몰라서
약혼식때는 친구들이 종로에 있었던
세븐 미용실에 데리고 가서
화장도 하라고 소개시켜 주었다.
경양식집에서 많은 분들을 모시고 약혼식을 했다.
일가 친척분들이 많이 와 주셨다.
돌나물이 집 사방에서 자라고 있다.
다들 웃고 축하 해 주는데,
내 친구들만 웃지를 안했다.
너무 말도 안돼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미국서 나와서 무얼 모르고
가난한 남자를 만나서
어쩌려고 그러는가 걱정을 하느라고
아주 심각한 얼굴들을 짓고 있었다.
참 그때 내친구들 때문에 내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다.
Berlin Flea Market에서 본 화초.
아니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미래를 만들어 가면 되지,
무슨 큰돈을 가진 남자를 만나서
편하게 살라고 그러라고 하는지
친구들이 이해가 안되었다.
친구들은 남자가 돈도 없이
무슨 배짱으로 결혼하겠다고 하느냐고
내 남편을 파렴치범으로 생각하는것 같았다.
Berlin Flea Market에서.
나는 자라면서 가난했어도
돈 앞에서 굽히는 일을 모르고 자랐다.
지금 나이들고 생각해 보니
가장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힘든 일도 마다 않고 하시는 분들도 있고,
힘있는 자들 앞에서 말한번 못하고 순종하게 되는 이유가
험한 세상에서 가족들에게는 바람막이 벽이 되어 주리라 생각을 하고
살기 때문 이라는것도 이제는 나도 안다.
Berlin Flea Market에서.
남편을 만났을 때만해도 정말 뭘 몰라서
그렇게 "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고 하던
말이 너무 신선하게 들렸고
당당해 보여서 남편을 선택했더니
내 친구들이 하얗게 얼굴이 변해서
내가 무슨 고생길로 걸어 들어 가는 줄 알고
불쌍하게 동정을 하는것 같았다.
돈이 그렇게 결혼 조건으로 중요한 친구들 이었는지 몰랐다.
공원에서.
그리고 몇 십년이 흘렀다.
사느라고 바빠서 그랬는지
죠지아주 친구와 초등학교때 친구와
더 어릴적 친구와는 서로 소식이 오갔었지만
다른 친구들하고는 소식도 없이 지냈다.
젊어서는 고생도 고생인줄 몰라서 그랬는지
잘 견뎌 왔고,아마도 친정에서 잘
도와 주시기도 해서 그랬던 것도 같다.
공원에서.
좋은 동네에서 아이들을 잘 키우던 어느날,
S방송국에서 딸이 아나운서로 일하던
같이 뭉쳐 다니던 네명중 한 친구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다.
죠지아주 사는 친구와는 서로 자주 전화도 했지만.
이 친구와는 어쩐일인지 별로 통화도 없었지만
S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던 친구딸을 보고 반가와서
축하도 해주고 싶어서 전화를 했더니
"얘 너 이젠 먹고 살만 하니 ?"라고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공원에서.
그리고 그뒤 몇마디 더 했는데 윙윙거려서 기억이 안난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윙윙거렸다.
너무 당황을 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잊어버리고
서둘러서 전화를 끊었다.
내가 알던 그 친구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내 남편과 결혼해서 가난해 본일이 없는데
아주 나를 거지 취급 하듯 하는 그 친구 때문에 충격이 왔다.
설사 가난하면 또 어때?
집 앞마당에서 물망초.
솔직히 이 친구는 부모님께서 연세가 늦은 나이에
낳으셔서 우리중에 제일 궁핍해서
내게서 외출복을 자주 빌려 가던 친구였다.
나는 어려운 친구여서 더 마음이 가고,
안쓰러워서 더 아껴주고 싶었던 친구였다.
가난했던 사람이 가난했던 시절을 잊고,
가난하게 보이는 사람을 무시 한다던
어떤 사람들의 얘기가 맞는가 보다.
그 날로 나는 이 친구를 내 안쓰는 물건 넣어두는 창고에
넣고 자물쇄로 잠그고 잊고 지내고 있다.
다른 한 친구는 남편을 여의고 시골에 살고 있다.
아직까지 가끔 카톡이 온다.
아마도 내가 소식없이 아이들 키우면서 바쁜동안에
지질이도 고생하는 피난민으로 나를 상상했었나 보다.
내 남편이 결혼전에 한 말 때문에....
"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